안녕하세요, 인문학적 시선으로 스크린의 여백을 읽어내는 에디터입니다. 오늘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의 신작 <퍼레이드>(The Parades)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단순히 '슬픈 영화'라며 눈시울을 붉히곤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최루성 드라마로만 남겨두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죽음이라는 거대한 단절 너머에서도 여전히 우리 곁을 부유하는 '그리움이라는 상태'에 주목해 보려 합니다.
영화는 어느 고요한 해변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재난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이곳에서, 주인공 미나코는 아들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다 자신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서서히 깨닫습니다. 이곳은 서늘한 심판의 장소가 아닙니다. 이승에 남겨진 미련이 너무 깊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영혼들이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정리하는, 아주 다정한 '완충 지대'입니다.

1. 폴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 — 우리가 해변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나,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어. 그래서 아직은 갈 수 없나 봐."
- 죽음을 직시하는 순간, 미나코의 나직한 고백
영화 속 인물들은 왜 곧장 다음 세상으로 향하지 못하고 해변을 서성이는 걸까요? 철학자 폴 리쾨르가 제시한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 개념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리쾨르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로 엮어낼 때 비로소 자아가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라는 문장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흐름을 예고 없이 끊어놓습니다. <퍼레이드>의 영혼들이 해변에 머무는 것은 단순한 집착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나의 삶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는지 확인받지 못한 채 남겨진 '정체성의 상실' 때문입니다. 미나코가 아들을 찾아 헤매고, 영화 제작자였던 마이클이 미완성 필름을 부여잡는 행위는 툭 끊겨버린 자신의 서사를 끝내 완성하려는 애틋한 시도입니다. 그들은 관계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마지막으로 긍정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2. 조지 보나노의 '애도 이론'과 기다림의 롱테이크
"우리는 그저 기다리는 거야. 마음속의 퍼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각자의 속도대로 말이야."
- 서두르는 슬픔을 멈춰 세우는, 아키라의 다정한 위로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인물들의 깊은 내면을 비추기 위해 롱테이크(Long Take) 기법을 꺼내 듭니다. 카메라는 재촉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다를 응시하거나 낡은 영사기를 돌리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긴 호흡으로 묵묵히 지켜볼 뿐입니다. 이 느린 호흡은 관객이 인물의 표정과 풍경 속에 스며든 감정의 질감을 온전히 체감하게 하며, '기다림'이라는 정서적 무게를 고스란히 나누게 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심리학자 조지 보나노의 '애도(Grief) 이론'과 결을 같이 합니다. 보나노에 따르면 상실 이후의 슬픔은 단계별로 척척 진행되는 숙제가 아니라, 개인마다 저마다의 속도와 색깔로 나타나는 복잡한 과정입니다. 영화는 이를 '비탄(Bereavement)'이라는 포괄적인 감정의 상태로 그려냅니다.
매달 열리는 퍼레이드에서 등불을 들고 걷는 행위는, 이 비탄을 혼자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나누며 걷는 치유의 과정입니다. 슬픔을 빨리 털어내야 할 방해물로 보지 않고, 그 슬픔 속에 충분히 머물며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허락하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3. 상태 중심 설계도로 읽는 '그리움의 공명'

"누군가 나를 기억해 준다면, 나는 사라지는 게 아니야. 그저 다른 모습으로 곁에 머무는 거지."
- 필름 속에 영원한 상태로 남고자 하는, 마이클의 마지막 유언
여기서 'JS아카이브 독학노트'의 핵심 관점인 '상태성(状態性)' 논리를 대입해 보면 더욱 흥미로운 통찰이 열립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생물학적인 '동작'이 멈춘 것일 뿐,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 '상태'로 우리 곁에 지속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동작을 멈춘 채 특정 감정에 고착된 상태이며, 영화는 그들이 이 모호한 안개 속에서 명확한 이해(分かる, 와카루)의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특히 실존 인물인 가와무라 미쓰노부 프로듀서를 투영한 캐릭터 '마이클'이 남긴 영화가 상영되는 장면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는 거대한 공명(Resonance)이 일어납니다. 마이클에게 영화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상태의 증거'였고, 남겨진 이들이 그 영화를 보며 미소 짓는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는 비로소 허물어집니다.
죽음은 관계의 소멸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만남에서 '기억을 통한 공존'이라는 새로운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감독은 "영화야말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고인의 유지를 이어받아, 삶의 부조리와 상실의 고통을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빛나는 기억의 상태로 정화해 냅니다.
4. 당신은 어떤 온도의 상태로 머물 것인가

"다녀왔어."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평범하고 위대한 인사
<퍼레이드>는 "안녕"이라는 시린 작별 인사 대신, "다녀왔어"와 "어서 와"라는 일상의 언어를 반복합니다. 이는 죽음조차 우리 삶의 연장선에 있다는 아시아적 사생관을 보여줍니다. 미나코가 아들의 성장을 확인하고 비로소 평온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부재가 아들의 불행이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깊이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나직이 묻습니다. "나는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의 기억 속에 어떤 온도의 상태로 머물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은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나누는 대화와 시선이 얼마나 소중한 인생의 설계도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을 넘어, 영화가 끝난 뒤 가슴에 조용히 고이는 감정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마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지적이면서도 다정한 위로일 것입니다.
김차장의 JS아카이브에서는 일본어 원리뿐만 아니라, 영화 속 깊은 이면의 이야기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선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글들을 참고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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