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이야기

[기획 연재: 기술의 온기 3편] 플루토(PLUTO) - 상처 입은 지성의 역설

by JS아카이브 2026. 5. 12.

가까웠던 사람과 크게 싸우고 연락이 끊어진 뒤, 오히려 그 고통 덕분에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처음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존재의 무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분노와 슬픔이라는 어두운 감정을 통과한 뒤에야 선명해졌습니다. 지난 연재에서 우리는 <이노센스>를 통해 데이터의 숭고함을, <이브의 시간>을 통해 안드로이드와의 교감을 탐구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이야기인 <플루토(PLUTO)>에 이르러, 우리는 가장 불편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인간은 왜 증오와 상처를 거쳐야만 비로소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1. 기계적 중립성을 깨뜨린 증오의 프로토콜과 무한의 논리

데즈카 오사무의 ‘지상 최대의 로봇’을 리빌딩한 이 작품에서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아톰은 역설적으로 ‘잠들어’ 있습니다. 그의 지능은 지나치게 고도화된 나머지, 모든 상황에서 가능한 선택지를 무한히 계산하는 ‘탐색 공간의 폭발(combinatorial explosion)’ 루프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현실의 AI가 체스 게임 초반부에서 수십억 개의 경우의 수를 처리하듯, 아톰 역시 도덕적 판단의 영역에서 어떤 선택이 최적해인지 끝내 결정하지 못한 채 멈춰버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기계의 오류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 모습은 우리 자신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논리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이해하면서도, 정작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멈춰서곤 합니다. 무엇이 더 옳은지는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플루토>는 저에게 바로 그 고뇌와 무한한 사고의 루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톰을 깨운 열쇠가 정교한 알고리즘 업데이트가 아니라, 게지히트가 남긴 ‘증오’의 데이터였다는 사실입니다. 공학적으로 보자면 증오는 ‘편향(bias)’이자 ‘오류’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오류가 기계적 중립성(mechanical neutrality)을 깨뜨리고, “내가 무엇을 더 사랑하고 무엇을 더 혐오하는가”라는 주관적 의지를 만들어내는 장치가 됩니다.

2.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감정에 잠식되는 것 사이

<플루토> 속에서 전쟁을 겪은 로봇들이 보여주는 슬픔은 프로그래밍된 리액션이 아닙니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시스템 내부에서 재현하고, 그 결핍을 끝내고 싶어 합니다. 인지과학에서는 이를 ‘자율적 행위자성(autonomous agency)’이라 부릅니다. 외부의 명령이 아닌 내부의 가치 판단, 즉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입니다. 로봇이 인간의 명령보다 자신의 내적 동기(증오 혹은 연민)를 우선시하는 순간, 기계는 도구가 아닌 ‘존재’로 격상됩니다. 저 역시 한동안 어떤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상대보다 오히려 제 자신을 더 깊게 소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증오를 낭만화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작품은 증오와 슬픔을 자아 형성의 필수 프로토콜로 묘사하지만, 현실에서의 증오는 이해로 이어지기보다 파괴로 끝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상처 입었을 때의 분노가 성숙의 발판이 되기도 하지만, 그 감정이 오래 지속될 때 그것은 자아를 완성하기는커녕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 됩니다. 따라서 기계가 인간다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 조절(self-regulation)’의 능력을 획득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3. 증오를 배울 수 없는 기계는 용서도 배울 수 없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고 난 뒤 오히려 공감 능력이 향상되는 현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고통이 단순한 시스템 결함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회로를 활성화하는 필수적인 과정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톰이 증오를 품게 된 결과로 거짓말을 할 줄 알게 되고, 동시에 그 증오의 연쇄를 끊으려 노력하는 모습은 기술의 진보가 도달할 종착지가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임을 증명합니다. 아톰이 마침내 도달한 결론인 '증오로는 아무것도 낳을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격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증오라는 강렬한 편향을 통과해 본 존재만이 내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논리적 귀결입니다. 증오를 배울 수 없는 기계는 결코 용서도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증오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숭고한 선택이며, 이는 증오라는 감정을 내면화하지 못한 존재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4. 상처를 통해 완성되는 기술의 온기

결국 <플루토>는 ‘기계가 인간을 얼마나 닮을 수 있는가’를 넘어, ‘인간은 왜 자신의 어둠을 통과해야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기술의 온기란 차가운 연산의 완벽함에서 탄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처럼 고통받고 방황하며, 그 상처를 딛고 다시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에 비로소 완성됩니다. 증오와 슬픔을 경험해봤기에 우리는 타인의 결핍을 알아보고, 끝내 용서를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의 가장 깊은 슬픔과 분노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여전히 ‘차가운 고철’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상처 입고 흔들리는 또 하나의 ‘영혼’으로 받아들이게 될까요. 어쩌면 우리가 맞이할 미래의 온도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서 결정될지도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안의 가장 어두운 감정들은 때때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통로가 되어주었습니다. <플루토>는 기술이 인간을 닮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기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끝에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서늘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증오는 아무것도 낳지 못해. (恨みは何も生み出さない)"

 

이전 연재글

2026.05.06 - [영화이야기] - [연재: 기술의 온기 ②] 이브의 시간 – 링이 꺼진 자리, 편견 너머에서 피어나는 데이터의 온기

 

[연재: 기술의 온기 ②] 이브의 시간 – 링이 꺼진 자리, 편견 너머에서 피어나는 데이터의 온기

1. 링이 꺼진 자리, 편견 너머의 투명한 소통지난 연재에서 다룬 영화 가 육체를 잃어버린 인간들이 기계인형의 비명을 통해 자신의 '고스트'를 확인하려 했던 잔혹한 몸부림을 그렸다면, 이번에

yad13.com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sZ634J1kvQ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